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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tals and others

질투

대개 이십대 후반쯤이 되면 주변이나 아는 사람 중에 소위 ‘잘나가는 사람’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신의 초라함 때문에 질투심이 솟는데, 제발 저놈 어딘가 제대로 틀어졌으면 하는 악담마저 속으로 품게 된다. 그러던 것이 삼십대가 넘어가면 희한하게도 조금씩 초연해진다. 잘나간다는 애들 소식을 워낙 많이 들어서 이제 익숙해진 걸까. 아마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이 몇 살 먹었다고 인격이 성숙해져서? 더더욱 아니다. 내 경우 이유를 찾자면, 그것은 남 흉보는 기술이 연마되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두 살밖에 안 많은데 팀장까지 하는 여자 선배한테는, "연애를 못 하니 일이나 해야지, 어쩔 겨." 얼마 전 소설로 등단한 동료에게는, "어쩐지 저놈 정신병 같은 게 있다 싶더니." 일도 잘하고 결혼생활까지 잘하는데 나이가 좀 있는 여자 선배에겐, "애가 없으니 저러고 살지." 외국에서 경영학 석사 따더니 대기업 들어간 후배를 두고는, "골빈 자식, 인문학 책 한 권은 읽어봤을까?" 도저히 흉볼 데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사람에게도 흉볼 틈은 있으니, "잘났다, 금수저 새끼."
어쩜 그리도 흉볼 구석을 바로바로 찾아내는지, 버락 오바마라도 와야 "아이고, 형님" 하면서 인정해주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 성장이란 측면에서도 도움이 안 되고 도덕적으로도 바람직하지 못한 폭력적인 태도라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나에게 좀더 관대해지고 싶기도 하다. '왜 나는 이럴까' 하면서 스스로를 책망한 적도 있었지만, 어쨌든 나도 열심히 안 사는 건 아니니까. 흉을 발설하고 남과 공유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자존감 약한 사람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좋은 방패라 해도 되지 않을까. 열심히 사는 데도 불구하고 언제가 되어야 잘 풀릴지 기약할 수 없는 없는 상태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며 부러워만 하는 것은 결코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잘된다 해도 결코 내가 샘을 내지 않을 좋은 친구들도 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이다. 잘되고 나서 사람이 바뀌어 잘난 척을 해대지 않는 이상, 나는 진심으로 그들의 성공을 기원할 것이며 그들의 행복을 빌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들에게 그런 사람으로 남아 있고 싶다. 나한테는 그것이 잘나가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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