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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_1

엘리의 야구장갑 2017. 8. 7. 21:40

 

들어가기 전에

 

1.

우선 우리가 다룰 작품에 대한 기본 정보다. 제목은 <일리아스>. 만든 사람은 호메로스(라고 전해진다). 서양 최초의 문학 작품(기원전 8세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문자로 기록된 시. 반복적인 운율에 맞춰 이야기를 전해 주는 시(서사시). 분량은 약 1만 5천 행, 현대식으로는 보통 두께의 책 한 권 분량이다. 전체는 스물네 부분으로 나뉜다. 내용은, 기원전 13세기(또는 12세기)에 있었다는 트로이아 전쟁 중에 아킬레우스라는 영웅이 분노한 사건의 전말이다. (33쪽)

 

트로이 전쟁을 역사 및 고고학 관점에서 접근한 배리 스트라우스의 <트로이 전쟁>도 읽을 목록에 추가해둘 것.

 

2.

호메로스 문제

보통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호메로스라는 시인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정말로 호메로스라는 사람이 있어서 이 작품들을 지었는지, 아니면 여러 사람의 손을 커쳐 변형되어 온 작품에 그냥 '호메로스'라는 가상의 저자 이름이 붙은 것인지 아직도 확정되어 있지 않다. (33쪽)

 

3.

구조

<일리아스>의 첫 세 권은 마지막 세 권과 짝을 이루어 '되돌이 구성'을 이룬다. 이 구성법은 시인이 직유를 쓸 때나, 등장인물의 말을 직접화법으로 전달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서로 짝이 되는 요소가 서로 대칭되는 위치에 나타나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예는 A-B-A의 꼴인데, 우선 어떤 주제를 언급하고 다른 주제로 갔다가, 다시 처음 주제로 돌아가서 말을 맺는 형식이다. (40~41쪽)

 

4.

이 작품은 아킬레우스 분노 사건을 그리면서 트로이아 전쟁 전체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중심적인 주제는 '분노'이고, 부차적인 주제는 '전쟁'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분노' 주제는 '전쟁'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일단 '전쟁' 주제가 두드러지고, 뒤로 갈수록 '분노' 주제가 강해질 수밖에 없다. 한데 반복을 구성 원리로 삼는 우리의 시인은, 부분들이 전체를 닮게 만들었다. 그래서 각 단위들도 전반에는 '전쟁' 주제가, 후반에는 '분노' 주제가 두드러지게 꾸며져 있다. (44~45쪽)

 


 

1권

 

서시

 

1.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를. (49쪽)

 

 

강유원 선생의 강의에서도 천병희 번역 <일리아스>에서 아쉬운 부분이라면 지적한 내용이다. 고전 서사시에서 첫 단어, 마지막 단어는 매우 중요한데, 원문의 첫 단어가 '분노'라고 한다. 강대진 선생 역시 재번역한 인용문에서 '분노'를 앞으로 옮겨왔다.

 

2.

서시를 보면 시작이 다소 '엉뚱하다'. 어떤 여신에게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노래해달라고 청하는 걸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것이 <일리아스>의 직접적인 주제다. 독자들이 기대하는 신화의 내용은 당시의 청중이 대부분 다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배경으로 이용될 뿐이다. (50쪽)

 

<일리아스>의 직접적인 주제는 '트로이 전쟁'이 아니라 '아킬레우스의 분노'이다. 세 여신이 파리스 앞에서서 내기를 했다던가 파리스가 헬레네를 납치하여 전쟁이 발발했다던가 하는 내용은 모든 청중이 알고 있다. 이것은 <일리아스>에서 비롯된 내용이 아니다. 일리아스는 두루 알고 있는 이야기 중 일부를 문학 작품으로 만들어낸 것에 해당한다.

 

희랍군에게 질병이 닥치다

 

3.

대개 내용을 요약할 때는 '아폴론', '아가멤논' 하는 식으로 고유명사를 그냥 사용하지만, 인용문에는 그런 식으로 되어 있지 않다. 아폴론은 '레토와 제우스의 아들'로, 아가멤논은 '아트레우스의 아들'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 이 서사시는 일정하게 반복되는 장단의 운율에 맞춰서 노래되던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그냥 고유명사를 사용하면 행 속의 그 자리가 요구하는 운율을 맞출 수가 없다. (53~54쪽)

 

4. 공식구 (예: '멀리 쏘는 아폴론', '날랜 함선', '발이 빠른 아킬레우스')

이 '불필요한' 수식어들은 대체 무엇인가? 이것 역시 운율을 맞추기 위해 집어 넣은 장치들이다. 그리고 이런 장치들이 자꾸 등장하는 것은 이 서사시가 문자 없이 창작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시절을 겪었고, 가객도 공연할 때마다 늘 같은 내용을 똑같이 읊는 것이 아니라, 매번 다른 구절을 그 자리에서 조립해 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객은 일종의 레고 블록을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즉석에서 끼워 맞춰 내놓는 형국이다. (54쪽)

 

5. 사태 한가운데로

<일리아스> 전체가 트로이아 전쟁을 황금 사과나 파리스의 판정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전쟁 중에 있었던 한 사건 속으로 '뛰어들었'듯이,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는 주제도 시간 끌 것 없이 곧장 핵심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로마 시인 호타리우스가 얘기했던, ;사태 한가운데로'(in medias res)라는 원칙의 적용 사례다. 작품이 시작되면 속도감 있게 중심적인 사건 속으로 돌입하고, 차차 그 앞뒤의 일을 채워 넣는 기법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뒤로 갈수록 점점 옛날 일과 앞으로의 일들을 알게 되고, 작품이 끝날 때쯤에는 전체를 조감할 수 있게 된다. (58쪽)

 

이는 현대에 글을 쓸 때도 적용될 법한 매력적인 수단이다. 시간 끌 것 없이 핵심으로 나아가고 사태의 본질과 관련되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생략하는 것. 글쓰기가 무릇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